비 오는 금요일 새벽 3시 41분.
서울 외곽, 국립의료원 중증외상센터 응급실.
적막을 깨고 들이닥친 건 다중 추돌 사고였다.
“응급 카트 준비! 출혈 많아요! 심박수 급강하!”
젊은 의사 문지윤은 이제 막 전공의 3년 차.
그러나 이곳에선 나이나 계급 따위 중요치 않았다.
심장이 멈추려는 환자 앞에선 누구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1. 첫 번째 심정지
“BP 70/40! 맥박 느려집니다!”
응급 카트에 실려 온 첫 번째 환자, 남성, 31세. 전면 충돌 차량의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심하게 함몰돼 있었고, 흉곽은 이미 골절로 무너진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는 심정지까지 남은 시간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환자도 이미 4명이 도착 대기 중이라는 점.
지윤은 선택해야 했다.
“심폐소생술 돌입! 에코로 심장 상태 확인해주세요!”
이 선택이 누군가의 생명을,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2. ‘선택’이라는 말의 잔인함
두 번째 환자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팔과 다리는 골절되었지만, 맥박은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출혈 가능성이 농후했다.
“선생님, 이 아이부터 수술실 올려야 해요. 지금 출혈 잡지 못하면…”
간호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윤은 멈칫했지만, 곧바로 무전기를 집었다.
“오전 3시 53분, BOR 수술실 확보 요청합니다. 환자 ID 10812 우선 배정.”
같은 시간, 첫 번째 환자의 심장이 멈췄다.
지윤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 그 남자의 가족이 도착하지도 않았다.
“살릴 수 있었던 건가요?”
“다 살릴 순 없어요.”
자신의 대답에 그녀조차 믿음이 없었다.
3. 골든 아워, 단 60분
아이는 수술대에 올려졌고, 심정지에서 돌아온 환자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응급실에는 또 한 명의 환자가 들어왔다. 심근 파열 가능성, 의식 없음, 혈압 없음.
지윤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이분도 수술실로?”
“아니요. 지금은… 수술실이 없습니다.”
의학은 과학이지만, 응급의학은 수학이었다.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가장 많은 생존 가능성을 계산해야 했다.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두 명을 포기하는 결정을.
냉정하게, 그러나 끝없이 흔들리며.
4. 아버지
응급실 한편, 은빛 백발을 가진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자신이 실려 온 것도 모르고, 곁에 앉은 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지윤은 가만히 다가갔다.
“아버지… 눈 좀 떠봐요. 나야, 지윤이…”
그 노인은 지윤의 아버지였다.
밤새도록 일하다 심정지로 실려 왔고, 그녀가 의사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정도로 병든 몸이었다.
지윤은 침을 삼켰다. 수술은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건 진통제 투여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는 것뿐.
“아버지… 조금만 더 버텨줘요. 나, 의사 됐어요.
사람들 살리고 있어요. 지금도…”
그 순간, 아버지의 손끝이 가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손이 지윤의 손을 가만히 덮었다.
아무 말도 없이. 따뜻하게.
5. 나를 버티게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난 지 2시간 후, 응급실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살아남은 아이는 회복 중이었다. 남성 환자는 뇌사 상태로 전환되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손을 모았다.
손끝이 떨리고, 눈동자가 말라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어섰다.
“다음 이송 케이스 몇 분 남았죠?”
“7분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7분이면… 생명을 살릴 수도 있겠네요.”
“이름은 문지윤.
직업은 중증외상센터 전공의.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